1.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이 내게 했던 특정한 행동, 혹은 내가 알고있는 그 사람의 특정한 면을 평가해 그 사람을 '착한 사람' 혹은 '나쁜 사람'으로 규정하곤 한다. 물론 행위와 행위자가 분리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특정한 면 역시 부정할 수 없는 그 사람의 일부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이런 규정이 완전히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한 인물의 구체적 행동이나 특정한 면을 평가하는 것과 그 사람 자체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며, 전자를 근거로 후자를 결론 짓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다.
2.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인류 역사상 매우 드물게 존재했던 성인(聖人)이나 그에 준하는 몇몇 인물들을 제외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사람은 누구나 상황에 따라, 혹은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이기 마련이고, 사람에 따라서는 과연 저게 한 사람의 모습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그 편차가 큰 경우도 적지 않다. 언제 어디서나 착하기만 한 사람, 혹은 언제 어디서나 나쁘기만 한 사람이라는 건 그래서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 등장인물의 특정한 면을 과장해야 하는 소설이나 영화에서와는 달리 현실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구체적 행동이나 특정한 면만을 보고 그 사람 자체를 평가할 때 자주 오류에 빠지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번거롭긴 하지만 우리가 타인에게 내린 평가가 그의 특정한 면에 국한된 것임을 항상 자각할 필요가 있다.
3. 앞에서 별 것도 아닌 내용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까닭은 링크한 김규항씨의 글과 그 글에 인용된 박찬욱씨의 글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젠 부자가 착하기까지 하다'는 박찬욱씨의 글이 저런 문제에 대한 면밀한 고려 없이 쓰여진 글이며, 그 글을 근거로 쓰여진 김규항씨의 글은 그래서 방향이 어긋난 글이라 생각한다.
4. 일단 위 글에 인용된 대로만 보자면 박찬욱씨가 '이젠 부자가 착하기까지 하다'는 평가를 내리게 된 근거는 젊은 상류계급 인사들의 무슨 모임에 불려가서 보게된 그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젠 부자가 착하기까지 하다'는 말에는 '과거에 부자들은 적어도 착하지는 않았다'는 평가가 전제로 숨어있다. 물론 김규항씨의 글에 쓰여진 바대로 과거에 부자들이 착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는 건 우리들 대부분이 알고있고, 또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돈을 버는 과정에서 보여준 그들의 모습에 국한된 평가지, 그들 자체에 대한 평가는 아니다. 돈을 버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자리, 예컨대 그들 끼리의 친목모임에서도 과연 그들이 착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는지 직접 보지 못한 이상 우리는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요새 젋은 상류계급 인사들이 그들의 친목모임에서 더할 나위 없이 착한 모습을 보였다 해서 그게 그들이 부를 축적, 유지하는 과정에서도 그런 모습일 거라 판단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때문에 '이젠 부자가 착하기까지 하다'는 글은 박찬욱씨가 과거 부자들의 친목모임에도 불려가본 게 아니라면 잘못된 전제에 근거한 글이거나, 동일하지 않은 잣대로 서로 다른 두 집단을 평가한 잘못된 글이다.
5. 지금 나는 부자들이 하나같이 타고난 이중인격자들이라서 자리에 따라 완전히 상반된 모습을 보인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위 2번에서 지적했듯 자리에 따라, 상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건 성인이 되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의 특징일 뿐, 부자들만의 특징일 수 없다. 내가 여기서 문제 삼고자 하는 건 부자가 사석에서 착한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이 왜 '진보적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곤혹스러운 일이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부자는 언제 어디서나 나쁜 사람일 거라고 믿는 게 진보의 이념이었나? 아니면 진보주의자들은 사석에서 본 모습만으로 그 사람 자체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인가?
6. 알다시피 마르크스 이래 좌파들, 혹은 진보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와 부르주아지에 줄곧 비판적이었던 이유는 부르주아 개개인이 하나같이 착하지 않은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부르주아지가 그들의 자본을 축적, 유지하는 근본적인 방식이 지독하고 악랄할 뿐더러, 그것이 부르주아 개개인의 성격이나 의지 따위에 흔들리지 않을만큼 견고하게 구조화되어 있는 사회가 바로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이었다. 즉, 자본을 축적, 유지하는 방식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삶의 다른 국면에서 부르주아 개개인이 착하든, 착하지 않든 그건 그들을 비판해온 좌파들, 혹은 진보주의자들의 입장과 충돌하는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누군가 젊은 부자들의 사적 모임에 불려갔다 와서 '이젠 부자가 착하기까지 하다'는 말을 했을 때 진보주의자나 좌파가 할 일은 자신들도 감당못할 '어떤 삶의 상황에서도 유지되는 진짜 인격'이라는 엄청난 잣대를 들이대 부자들을 비판할 게 아니라, 그런 말을 한 사람에게 조용히 이렇게 되묻는 것이어야 했다.
그래서 이젠 부르주아지가 그들의 자본을 축적, 유지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기라도 했는가? 젊고 착한 부르주아들은 그들의 할아버지나 아버지들과는 달리 이제 착한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그들의 부를 축적, 유지할 수 있게 되었나? 자본주의 사회는 이제 정말 그렇게 아름다운 사회로 바뀌었는가?
물론 부르주아지가 그들의 자본을 축적, 유지하는 방식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은밀해지는 상황에서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부르주아들이 자신의 고상한 인격을 과시할 수 있고, 또 어느 정도는 그래야만 하는 자리에 불려다니면서 저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한겨레 21]에서 finching님이 퍼오신 것을 다시 퍼옴.과거 강준만 교수의 말과 행동을 알고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궁금하다. 과연 저 글에서 '연고주의', '호형호제 문화'의 자리에 '지역주의'를 대입해도 강준만 교수는 동의할 것인가. 조선일보를 둘러싸고 벌어졌으며, 지금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제문제들에 대해서도 강준만 교수는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